영상번역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어언 10년전... 영어를 좋아하고 영상 시청을 좋아한다면 한 번쯤 들어본 직업 '영상 번역가'. 그리고 내 꿈은 처음부터 영상번역 작가가 아니었다.
영상 번역가는 영어를 좋아하고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나 경험이 많을 수록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해외에 사는 나 같은 사람도 한국과의 인연을 놓지 않을 수 있는 좋은 직업이라고 느낀다.
그래서, 영상 번역에 입문하기까지의 나의 배경과 계기를 나누고자 한다.
(긴 글 주의)
- 나의 배경
영상 번역에 입문하기까지의 내 배경은...
국내 대학 생명공학 학사 졸업
독일 대학원 석사 졸업
영국 런던 자원봉사자 10개월
브라질 상파울루 창업 프로그램 6개월
바이오의약품 제약회사 R&D 팀과 규제과학 팀 근무
2024년 현재, 30대 중반인 지금은 퇴사 후, 사랑하는 외국인 남편과 결혼하여 남미에서 내 경험을 살려 노매드의 삶을 꾸려가고있다.
항상 영어와 영상, 사진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기에 영상 번역 작가라는 길이 나에게 열린 게 아닌가 싶다.
이 직업을 알게 된 것은 대학교 도서관에서 영상 번역가의 책을 만나면서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가지고 있는 습관이 있다.
답답한 마음이 들 때마다, 학교 도서관에 가서 책 제목을 쭉 읽어보며 그 날 기분에 따라 책을 읽고는 했는데, 아직도 뚜렷이 기억난다. 그때 처음으로 영상 번역가가 쓴 책을 읽고 '영상 번역 작가'라는 직업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 1장 외국에서 영어를 배울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어!
항상 영어를 좋아했던 나는 학교에 휴학서를 던지고 영국에 자원봉사자로 10개월을 보냈다. 당시 한 번도 해외여행을 해본 적 없는 21살의 어린 청년이 '영어를 배울 수 있다면 이까짓 것!' 이라는 마음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직진했다. 지금 30대 중반인 내가 스스로 돌이켜 봐도 한 열정한 것 같다.
그런데, 그때는 몰랐다. 10개월 동안 영국 런던에서 자원봉사자로 지냈던 시절이 손에 꼽힐 정도로 힘든 시기가 될 줄... 하지만 주사위가 이미 던져진 걸 어떡하나.
사실 런던으로 떠나게 된 계기도 어느 날 영국에서 자원봉사를 한 저자의 책을 읽고 나도 도전해야겠다! 하고 혼자서 진행했다.
물가 비싼 런던으로 유학을 보낼 형편이 안 됐던 우리 집안이지만 항상 영어권에서 살아보기를 꿈꿨다. 자원봉사도 하고 적은 월급과 숙소까지 제공해 주는 자원봉사 지원은 나에게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기회였다.
물론 부모님께는 미리 말씀드리면 붙잡으실 것을 알기에 합격한 후 말씀드렸다. 이력서 쓰고 런던 자원봉사 단체에 메일을 보내고 영어 인터뷰까지 본 후 비자까지 혼자서 다 처리해서 우여곡절 끝에 런던으로 떠나게 되었다.
- 2장 나의 첫번째 통번역 업무
이 글의 주제는 따로 있으니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내가 처음으로 통번역 일을 한것은 22살 때 런던에서 영어를 배우고 자신감이 한 껏 올라와 있을 때, 학업을 병행하며 안전화 신발을 만드는 업체에서 해외 업체와 유무선상의 통번역 업무를 하는 것이었다.
영상 번역 업무는 아니었지만, '통번역 아르바이트'라고 검색했을 때 내게 오는 기회는 무조건 다 받아드렸기 때문에 첫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6개월 정도 일을 하고 나는 통번역을 그만두게 되었다.
- 3장 또 다시 해외로, 남미로!
당시 전공이 나와 맞지 않는 다는 생각에 영어를 좋아하는 것을 살리려 KOTRA에 입사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코트라에서 GLOBAL YOUNG BUISNESSMAN이라는 타이틀으로 브라질 상파울루, 두바이에서 6개월 동안 창업활동에 도전해 보고 싶은 사람들을 뽑았다.
항상 남미에 가보고 싶었기에 상파울루에 지원했는데 '포르투갈어도 못하는 내가 뽑힐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에서 포르투갈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마음으로 지원했다.
참... 이 글을 쓰며 몇 번이고 이런 생각이 든다. 그 때의 에너지... 그립다. 그렇게 총 6명이 뽑혀 상파울루에서 창업을 위한 시장조사를 했고 한국의 업체와 손을 잡고 또 다시 영어와 포르투갈어로 통번역을 하며 중간다리 역할을 했다.
- 4장 언제까지고 아마추어로 남을 수 없어
코트라 주관 예비 창업가가 되어 시장조사를 하고 실제로 업체에 사업계획서를 쓰고 현지에 제품을 소개했지만 가장 많이 느낀 건, 언제까지고 아마추어로 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코트라와 함께 일한 경험이 첫 직장 경험이었는데, 그곳에서 배운 건 전문가로서 자신의 커리어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학업으로 돌아가 전문성을 키워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와 석사과정을 밟기로 한다. 하지만, 국내 대학원의 시스템을 직접 본 나는 해외 대학원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여러 번의 해외 생활로 인해 지친나는 한국에 있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바라는 자에게 길이 열린다고 했나? 당시 박근혜 정부 시절, 우수한 해외 대학을 국내로 들여와 외국에 나가지 않고 국내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많은 해외 대학들이 한국에 들어왔다.
운이 좋게도 내 전공인 Bio-chemical engineering 독일 대학원 과정이 부산으로 들어왔다. 게다가, 무료로 공부하는 독일의 시스템에 따라 학비 없이 독일 대학원에서 공부할 수 있었고 원한다면 독일 본교에 가서 공부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영어로 모든 커리큘럼이 제공됐다! 지원을 안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1년은 국내에서 나머지 1년 동안 독일 본교와 독일 국립연구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 5장 바이오제약회사 취업
바이오제약 회사에서 운이 좋게도 면역항암제의 연구 단계와 개발 단계를 다 경험해 볼 수 있었다.
연구 단계는 실험실 스케일에서의 항체 발굴과 생산, 효능 평가가 주라면, 개발 단계는 생산성과 효능이 입증된 항체 후보를 이용해 작은 스케일의 쥐를 이용한 비임상을 하고 세포주와 제형 개발 및 쥐, 원숭이 큰 스케일의 비임상과 1차 임상을 진행했다.
- 6장 30대 중반에 영상 번역 작가에 발 들이다
퇴사 후, 남미에서 자리 잡고 산지도 4년이 다 돼가는 지금 나는 영상번역 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그 첫 번째 과정으로 글밥 아카데미의 영상번역 입문반에서 체계적으로 나의 기반을 닦고 있다. 영상번역을 하는 순간순간이 정말 즐겁다. 4년 동안 여러 일을 시도하고 방황해 봐서 일까? 도전하고 방황한 경험이 많을 수록 무슨 일이 나와 맞는지 점점 확신이 생긴다. 이 순간 만큼은 길게 고민하지 않고 일단 시작하고 보는 내 성격에 감사할 뿐이다.
영상번역이 통번역 업무보다 좋은 이유는, 아마도 내가 영상과 사진을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직접 체험하면서 그 이유가 더 늘어났다. 영상 번역은 글자를 번역하는 것이 아닌 인물의 배경과 톤, 상황까지 번역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상번역은 대사 뿐만 아니라 감정과 스토리를 함께 번역해야한다... 그래서 업계에서는 '영상 번역가'가 아닌, '영상번역 작가'라고 부르는 이유가 아닐까?
내가 번역한 자막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시청자에게 감동을 전달한다니 자부심이 느껴지고 그에 따른 책임감도 느껴진다.
앞으로 영상번역 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꼭 통번역 대학을 졸업하지 않아도 도전하고, 전문가가 될 수 있구나하고 느꼈으면 한다. 관심이 간다면 그냥 부딪혀 봤으면 좋겠다! 중간쯤가서 내 일이 아니라고 느껴도 나에 대해 알았으니 좋은 일 아닌가!
- 마무리하며...
우리가 살면서 많은 일에 도전하고 또 실패하는 이유는 이번 생을 나답게 잘 살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 각자 가지고 있는 성향에 따라 자신과 잘 맞는 일이 있다고 30대에 깨달았다. 사회가 좋아하는 직업을 가지지 않았다고 해서 무시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옳던 그르던 나를 병들게 하는 일이라면 그만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영상 번역 뿐만 아니라 이번 생을 나답게 잘 살아내고 싶은 사람, 취향을 쓰고 싶은 사람으로서 가끔 여기에 돌아와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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